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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의 아랫목 같은 옛이야기

늙은 과부와 효성스러운 일곱 아들

진영갈매기 2020. 12. 5. 13:08

경주 월정교: 통일 신라 시대에 지어진 교량(橋梁), 경주 월성과 남산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옛날 옛적, 신라 시대에 어떤 가난하고 늙은 과부(寡婦)가 일곱 아들을 데리고 경주 남천(南川) 근처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일곱 아들이 모두 효자인데도 어머니는 항상 춥고 슬퍼 보였습니다.

 

아들들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어머니께서 따뜻하게 주무실 수 있도록 밤마다 방에 불을 땠습니다. 그래도 (아들들이 더 많이 나무를 해다가 불을 때도) 어머니는 항상 춥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밤, 큰아들이 오줌 때문에 잠을 깼다가 어머니가 방에 계시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아들은 크게 걱정을 하면서 어머니를 기다렸습니다.

 

새벽이 되자 마침내 어머니가 돌아왔습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무사한 것을 고마워하면서 자는 체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다음 날 밤에도, 아들들이 잠드는 것을 기다리더니, 살그머니 나갔습니다. 큰아들은 어머니 모르게 뒤를 밟았습니다.

 

마을 끝에 잇는 냇가에 다다랐을 때 어머니는 치마를 걷어 올리고 물을 건넜습니다. “아이고, 차가워라! 살을 에는군.” 그녀는 중얼거리며 냇가 저쪽에 있는 허름한 초가집으로 갔습니다.

 

경주 남천

 

집 앞에 멈추어 서서 어머니는 누가 들을세라 사립문을 흔들며 말했습니다. “아범, 계셔요?”

늙은 남자가 나오면서 그녀를 반기며 말했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어멈.”

 

그는 짚신을 만들어서 생계를 잇는 늙고 가난한 홀아비였습니다. 큰아들은 이제야 어머니가 왜 그랬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동생들을 깨운 다음 자신이 본 것을 말했습니다.

 

칠 형제는 즉시 냇가로 나가 돌로 징검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잤습니다. 새벽이 되어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냇가에 이르러 매우 놀랐습니다.

 

 

칠성교 1

 

칠성교 2

 

 

전에 없이 돌로 된 징검다리가 놓여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녀는 아들들이 그 다리를 놓았는지 몰랐습니다. 어머니는 이 일에 감사하며 하늘에 축원을 올렸습니다.

 

이 냇가에 디딤돌을 놓은 사람들을 북쪽의 일곱별이 되게 해주세요.”

 

세월이 흘러 일곱 명의 효성스러운 아들들이 죽었을 때 그들은 하늘의 북두칠성이 되었습니다.

 

 

북두칠성이 된 일곱아들

 

그 후에 그곳에 다리를 놓았는데 그 다리가 바로 칠성교입니다. 위의 이야기는 경상북도 경주 지역에서 전승되는 교량전설(橋梁傳說)로서 칠성교전설(七星橋傳說)이라고 합니다.

 

 

칠성교의 흔적

 

 

두 번째 버전입니다. 아들들이 이 사실을 알고 서로 의논하기를 어머니가 밤에 물을 건너다니시니 자식의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고 돌다리를 놓았습니다. 어머니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밤에 나다니는 버릇을 고쳤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그 다리 이름을 효불효교(孝不孝橋)고 불렀다고 합니다. 어머니에게는 효성스러운 행위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불효가 되는 일을 했다는 것이겠죠.

 

경주 효불효교

 

세 번째 버전도 있습니다. 죄를 뉘우친 형제들의 어머니가 다리에 목을 매고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이 다리를 효불효교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효행을 하려고 다리를 놓은 것이 어머니를 죽게 했기 때문에 불효한 일을 하게 된 셈이 되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조선 시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홀어머니의 밤 나들이는 인정될 수 없는 행위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일곱 아들은 어머니의 행위를 비난하지 않고 다리를 놓아드렸습니다.

 

이것은 아들들이 어머니와 같은 편이 되어서 그녀의 삶을 긍정하고 수용한 것이 됩니다. 첫 번째 버전이 설화 향유층, 즉 민중의 공감을 제일 많이 얻은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자식 없는 여인이나 젖이 적은 여인이 이 다리에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고, 짝사랑으로 고민하는 남녀가 이 다리에 빌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지금도 경주사람들은 믿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설화에는 민중적 시각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주 효불효교 터()

 

 

 

* 참고문헌

동국여지승람21 경주 교량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

장덕순,한국설화문학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70)

정인섭 지음. 최인학, 강재철 역편, 한국의 설화(단국대학교출판부, 2007)

 

이 설화는 동국여지승람21 경주 교량조에 수록되어 있고,

한국구비문학대계경주 월성편에도 2편이 채록되었는데,

각 편의 내용은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소개한 것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입니다.

 

다리는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었던 신라 시대의 (경상북 도 사적 제457호지정) 사적입니다.

다리는 신라 경덕왕 19(760) 건설되었는데

길이가 최소 55, 상판 너비 최소 12, 교각 높이만 해도 5.5에 달하는

초대형 돌다리[石橋]였음이 확인됐습니다.

 

칠성도

 

 

칠성각(七星閣)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장수와 재물을 관장합니다. 칠성은 본래 도교에서 신앙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들어와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후 불교에 수용되어 절 안에 칠성각을 짓고 칠성신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칠성각은 우리나라 절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전각 중의 하나로서,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됩니다.

 

 

청도 운문사 칠성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