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서치 어드바이저> <네이버 서치 어드바이저 끝> '한겨울의 아랫목 같은 옛이야기' 카테고리의 글 목록

한겨울의 아랫목 같은 옛이야기 28

사람 괄시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이유

옛날에 현풍 곽씨(玄風郭氏) 문중에 한 노총각이 있었다. 부모 대에 집안이 망한 곽 총각은 어쩔 수 없이 외삼촌 집에 얹혀서 살게 되었다. 곽 씨는 사랑방을 청소하고, 요강을 비우는 등 허드렛 일을 하며 눈칫밥 얻어먹기를 한 삼 년 했는데, 하루는 외삼촌이 어떤 손님을 데리고 왔다. 그 손님은 관상을 잘 보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는데, 곽 씨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이 집에 와 있는 연유를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돈도 집도 아내도 없어서 외삼촌 집에서 식객으로 산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관상가는 외삼촌에게, 저렇게 훌륭한 사람을 사랑채에 처박아두고 어찌 썩히고 있느냐며, 깨끗한 옷과 하루 쓸 노잣돈만 주어서 밖으로 내보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곽 총각은 속으로 ‘외삼촌이 사람을 시켜, 나..

복전(福田)을 쌓는 최고의 방법은 무주상보시

때는 신라 시대였다. 영암에서 나주로 가는 길목, 영암천 옆에 작은 주막이 하나 있었다. 그 주막에는 나이 든 주모를 도와 허드렛일을 하는 덕진이라는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일찍 부모를 여윈 오갈 데 없는 고아였다. 영암천은 서해안에서 바닷길로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끝 지점으로, 목포에서 들어오는 배가 마지막으로 정박하는 나루터가 있는 곳이다. 영암천은 폭이 백자 남짓으로 나무다리를 건너야 나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바닷물이 차오를 때는 나무다리를 건너가기가 위험했으며, 물살에 다리가 무너져 내린 경우가 허다했다. 이럴 때면 영암천 상류 누릿재까지 한나절을 돌아가야만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어느 해 사월 초파일이었다. 주모의 허락을 받은 덕진은 첫새벽에 일어나 월출산(月出山) 도갑사(道岬寺)..

얼굴상은 골상만 못하고 골상은 마음상만 못하다.

북송(北宋) 시대 유명한 재상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젊었을 때 이야기라고 전해진다. 당시 수도 개봉(開封, kaifeng)에 용하기로 소문난 유명한 관상가가 있었다고 한다. 이 관상가는 사람이 대문으로 들어올 것 같으면, 그 사람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샛문 사이로 관상을 다 보았다. 들어오는 사람이 재상이 될 관상이면 마당까지 나가서 정중히 맞아들이고, 고을 원님쯤 될 관상 같으면 방문을 열고 섬돌 아래까지 나가서 맞아들이며, 진사 벼슬쯤 할 관상 같으면 문을 열고 그 사람을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그 정도도 못 할 사람 같으면 아예 문도 열어보지 않고 방으로 알아서 들어오라고 했다. 범중엄이 젊어서 아직 벼슬을 하기 전이었다. 장래 운수가 궁금해서 관상을 보러 갔는데, 샛문으로 범중엄을 ..

길흉화복이 생겨나는 근원

조선 숙종임금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경기도 파주(坡州)의 적성(積城) 마을에 이재교라는 시골 부자가 살고 있었다. 이재교의 조부는 원래 함경도에 있는 화전민 집에서 태어났다.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떠돌아다니다가, 흘러 흘러서 적성마을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그는 원래 근면 성실한 데다가 의리가 있고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좋아했다. 누가 굶는다고 하면 남모르게 자기네 집 저녁 지을 쌀을 퍼다 주는 등 적선을 베풀어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었다. 하지만 워낙 없는 살림에서 시작해서 자기 대에는 겨우 밥술이나 굶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들 대를 거쳐, 손자인 재교 대에 이르러서는, 해마다 추수가 1,000여 석에 이르는 큰 부자가 되었다. 손자 역시 조부와 성품이 비슷해..

시아버지가 사위가 되고 며느리가 장모가 된 연유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아들하고 갓 시집온 며느리가 오손도손 사이좋게 살고 있었습니다. 두 늙은이는 아들 하나만 데리고 적적하게 살다가 남의 집 딸을 데려다가 내 며느리를 삼으니 친딸처럼 여겨져서 며느리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아니하였습니다. 품성 좋은 며느리도 역시 노부부를 시부모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친부모로 생각하며 잘 모셨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요? 며느리 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정이 막 새록새록 돋아나려 할 때 시어머니가 병이 덜컥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미처 손써볼 겨를도 없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옛말에 ‘며느리 들어 삼 년이 중하다’는 말이 있는데, 며느리 들자 시어머니가 세상을 뜨는 변고가 생기니, ‘제 탓인가?’ 여겨, 며느리는 그만 몸 둘 바..

하늘이 맺어준 연분을 인간이 어떻게 하랴?

고려 시대 개경(開京) 땅에 김범석이라는 젊은이가 살았다. 그는 나이가 스무 살이 훨씬 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까닭은 아내 고르는 조건이 너무 까다로웠기 때문이었다. 조건은 가문이 좋고, 부자라야 할 뿐 아니라 얼굴이 이쁘고 몸매까지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입에 맞는 떡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세월만 헛되게 보냈다. 그러던 중 어느 해, 바람이라도 쏘일까 하고 서경(西京)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어느 객주 집에 여장을 풀게 되었다. 그런데 객주 집 노파가 범석의 외모와 옷차림을 보더니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생글생글 웃으며 중매쟁이 노릇을 할 것을 은근히 자처했다. “이 지방에 가문도 좋고 부자인 데다 인물도 아름다운 색시가 한 사람 있는데 마땅한 신랑감이 없어서 ..

통도사 스님과 그를 절 앞에 버린 어머니

옛날 조선 정조대왕 시절에 경상도 양산 통도사에는 원광(元光)이라는 훌륭한 법사가 한 분 계셨다. 그 스님은 핏덩이일 때 누군가 불쌍한 중생이 버리고 간 아이였다. 이십여 년도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이다. 새벽예불을 하기 전 목탁을 치면서 도량(道場)을 돌고 있던 기도 스님이, 갑자기 어디에선가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스님은 목탁 치는 것을 중단하고,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하고 귀를 기울여서 가만히 들어보았다. 아무래도 일주문 근처인 것 같았다. 급하게 가보니 아이가 포대기에 둘러싸인 채 울고 있었다. 절 앞에 아이를 두었으니 기막힌 사정이 있었던 것이겠지.…… 옛날부터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들지 않는 것이 절집의 불문율이라, 기도 스님은 관세음보살의 뜻이거니 하였다. 이것저..

그대를 향한 일편단심, 내생을 기약하다

고려 시대 몽골군이 끊임없이 우리 민족을 괴롭히던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섬진강 인근에 감 동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혼인한 지 채 1년도 안 되는 새신랑이었는데, 그만 전쟁에 징발되어 싸움터에 나갔다가, 운이 나쁘게도 몽골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동석은 압록강을 건너 멀고 먼 만주 땅 심양(瀋陽)으로 끌려가서는 그곳에 세워진 고려인 노예시장(奴隸市場)에서 농장주에게 팔려서는 이름도 모르는 낯선 오지로 끌려갔습니다. 동석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는 매섭게 추운 만주 하얼빈 근처의 농장에 갇혀 살면서 심한 노역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덧 6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강물처럼 지나갔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지내는지?,…… 부모님은 잘 계시는지?,…… 섬진강 강물은 잘 흐르고 있는지..

그리워라! 관세음보살을 감동하게 만든 순백의 사랑

청년 김생은 밤새워 보림사 대적광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 주변을 천천히 돌았습니다. 일찍 아내를 잃고 탐진강에서 고기를 잡아 홀아비의 몸으로 어렵게 김생을 키우던 아버지가 몹쓸 병으로 세상을 떠난 지 오늘로 딱 3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묘지 옆에 움막을 짓고, 지극정성으로 3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김생은 어느덧 18살의 의젓한 사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가지산 보림사 명부전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가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김생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아미타부처님께 기원했습니다. 부친의 유언대로, 이제 오늘 밤이 지나면, 김생은 고향 장흥(長興)을 떠나서 멀리 낯선 땅 한양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한양 남대문 근처에는 박돌석이라는 부친의 죽마고우 한 분이 살고 ..

시래기죽으로 차린 제사상

설을 맞이하여, ㅎ! 돌아가신 부친이 부자인 아들의 제사상이 아니라 가난한 아들의 시래기죽으로 차린 제사상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어떤 곳에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동쪽 마을에 사는 형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이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서쪽 마을에 있는 동생은 부잣집으로 장가를 가서 인근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떵떵거리고 살았습니다. 때는 조선 시대라 제사를 반드시 큰아들이 책임져야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잘사는 동생을 두고 못사는 형이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마는, 나라의 법도가 그런 것을 어쩌겠습니까? 없는 집일수록 제사가 자주 돌아오는 것일까요. 가난한 형님 내외는 한 달이 멀다 하고 찾아오는 제사의 제수 마련하느라, 일 년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