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서치 어드바이저> <네이버 서치 어드바이저 끝> 도깨비의 부탁을 거절한 선비 심생

한겨울의 아랫목 같은 옛이야기

도깨비의 부탁을 거절한 선비 심생

진영갈매기 2020. 12. 6. 17:32

관촉사 대웅보전의 도깨비

 

조선 500년 왕조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한양 남대문 밖에서 세상이야 어찌 됐든 간에 과거시험에 목을 매달고 사는 심생(沈生)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선비 

 

집은 부엌 한 칸, 방 두 칸인데 말이 좋아 삼간 초옥이지, 후락하고 다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삼 간이었다.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젊은 아내와 같이 사는데, 돈 들어올 곳이라고는 바늘구멍만큼도 없는 백면서생이라 계절이 바꿀 때 갈아입을 옷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천만다행하게도 병조판서와 동서 간이라, 아내의 얼굴을 보고, 그 집에서 일용할 식량과 나무 등은 철 따라 보내주었다.

 

어느 해 겨울 사랑방에서 책을 읽다 과거가 언제 있나 마음속으로 셈을 하며 딴짓을 하고 있는데 문득 천장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심생은 긴 담뱃대를 가지고 천장을 두드렸다. 쥐라고 생각하고 쫓아내려 한 것이다.

 

그랬는데 웬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쥐가 아니라오. 그대를 만나려고 먼 곳에서 일부러 찾아왔는데 이렇게 박절하게 대하다니 그런 법이 어디 있소.”

 

천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심생은 깜짝 놀랐다. 목소리는 사람 목소리인데 사람일 리는 없고, 대낮에 귀신이 나올 리도 만무하고.……

 

 

도깨비

 

눈알이 휘둥그레져 있는데 또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먼 길을 오느라 배가 몹시 고프오. 밥 한 그릇만 주시오.”

 

무서운 생각이 든 심생은 대꾸도 없이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이 사실을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내 누구도 그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그런데 심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중에서 또 말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당신들 여럿이 공연히 나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헛소리를 늘어놓을 생각은 하지 말아요.”

 

이 말은 들은 심생의 어머니와 아내가 기겁해서 달아났다. 그렇게나 말거나 도깨비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쫓아다니며 크게 소리 질렀다.

 

겁낼 것 없어요. 내가 앞으로 오래 이 댁에 머무를 작정을 하고 왔소. 그러니 한 식구(食口)인데 너무 그렇게 귀신 보듯 하지 마시오. 나는 귀신이 아니라 도깨비니, 빨리 밥이나 한 상 차려주시오.”

 

 

소박한 밥상

 

하는 수 없이 밥을 한 상 차려 마루에다 내다 놓으니, 도깨비의 형체는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는데, 후루룩 짭짭하는 소리와 함께 밥과 반찬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감쪽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보통 귀신이 흠향(歆饗)하는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심생이 물었다. “너는 웬 도깨비이며, 어떤 인연으로 내 집에 찾아왔느냐?”

 

내 정체와 인연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이제 배불리 먹었으니 나는 갑니다.”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더니 도깨비는 사라지는 것이었다.

 

심생과 식구들은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아주 간 줄 알았던 도깨비가 다음 날 또 찾아와서는 밥을 달라고 해서 먹고 가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매일 내왕했다. 더러는 하룻밤 머물며 술을 내와라, 떡을 내오라 하면서 심생의 가족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심생과 식구들은 도깨비와 익숙해지기는 했으나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부적

 

 

하루는 어머니가 하는 말을 듣고 붉은색 부적과 함께 온갖 귀신 쫓는 방법을 써서 집 안팎에 붙여놓았다. 그랬더니 천장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해코지하는 요괴가 아니오. 글깨나 읽은 선비라고 여겼더니 남 우세스럽게 이게 무슨 짓이오, 이따위 잡스러운 것들은 내게 아무 소용없소. 얼른 부적을 치워버리시오.”

 

 

요괴

 

 

겸연쩍어진 심생은 부적을 치웠다, 그러면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한 마디 툭 던졌다.

 

너는 스스로 요괴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앞날의 화복을 점치는 영물(靈物)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된다 뿐이겠소?”

 

그래에~!, 그렇다면 우리 집안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주인어른의 수명은 예순은 훨씬 넘겠지만 일흔은 안 될 것이오.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하는 줄 알고 있는데, 미안하지만 금생(今生)에는 과거 운이 없소이다. 앞으로도 판서 댁에서 평생 식량을 얻어먹고 거지처럼 살 것이오, 자제와 손자분 역시 수명은 길겠지만, 물과 벼슬 운이 없소이다.”

아니, 그러면 우리 집안은 영영 일어날 수……?”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 이 세상에서 주인어른이 쌓은 업이 두 생을 뛰어넘어 증손자 대에서 응보(應報)를 받겠소이다. 증손자 대에 가면 과거 따위에 급제하여 집안의 영달을 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큰 공을 세우겠소이다.”

 

심생의 실망스러운 표정을 보고 도깨비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비님이 이번 생에 과거 급제하고 부귀영화를 누릴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만,……

 

심생은 급하게 도깨비가 있다고 여겨지는 쪽으로 두 손을 모았다. “무슨 방법이?”

 

증손자의 운명과 바꾸는 것입니다.” “바꾸다니,…… 어떻게?”

 

보시다시피 도깨비라! 내가 길흉을 바꿀 정도의 능력은 갖추고 있습니다. 빈한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선비님이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니 내가 증손자의 운명을 주인 양반과 바꾸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관촉사 대웅보전의 도깨비

 

그렇게 하면?”  “선비님은 이번 과거에 급제하여 남은 평생 떵떵거리고 잘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 나라의 형편이 몹시 어렵습니다.”

 

갈수록 어려움이 점점 심해져서 증손자 대에 가면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의 지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증조할아버지와 운명이 바뀌었으니 나라를 구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래도 조상들이 남겨놓은 재산으로 한평생 배부르고 등 따시게 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모든 것은 선비님에게 달려있죠. 그까짓 나라야, 선비님 죽고 난 뒤의 일이니, 나 몰라라 할 수도 있고,……

 

나 몰라라 할 수도 있고?”  “보지도 못할 증손자가 나라 구할 때를 기다리며, 평생 부인을 앞세워서 병조판서 나리 댁에 빌붙어 살 수도 있습니다.”

 

심생은 어머니와 부인을 부른 다음, 도깨비가 이야기 한 대로 말했다. 한참 서로 눈치를 보더니, 어머니가 먼저 볼멘소리를 했다.

 

나는 매일 보리죽이나 먹고 한겨울에도 여름 적삼을 입고 사는 데에는 지쳤다. 도깨비가 말한 그런 엉터리 소리를 믿느냐.”

 

아내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출가외인이 매번 언니를 앞세워서 애걸복걸 식량을 얻어오는 것에 이제 지쳤습니다. 노복(奴僕)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면서 판서댁을 다녀오면 눈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당장 아들 하나 있는 것도 제대로 먹이고 입히지도 못하면서, 어느 세월에 손자도 아닌 증손자가 그렇게 장한 일을 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심생이 다음 날 들른 도깨비에게 말했다. “식솔이 모두 반대하는군. 차라리 없는 손자 환갑을 기다리는 것이 빠르겠다고 하는군.”

 

도깨비가 말했다. “선비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심생이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일세.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도깨비가 코웃음을 치면서 빈정거렸다. “내가 헛짓을 했습니다그려. 오늘이 선비님을 뵙는 마지막 날이 되겠군요. 조선 천하를 뒤져 그래도 의기 있는 선비를 찾느라고 찾았는데,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인데도, 쯧쯧……

 

선비라는 자들이 눈을 벌겋게 뜨고 공부를 부귀와 바꾸지 못해 안달이니, 후유! …… 약속한 대로 선비님은 과거에 급제해서 어진 백성의 피를 빨면서 벽에다 똥칠하는 그 날까지 잘 먹고 잘살 것입니다.”

 

 

 

 

 

우리나라 전통 도깨비 

 

그날 이후로 도깨비는 심생의 집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때는 정축(丁丑, 1817),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17년이었다.

 

그때부터 점차 나라에 망조가 들기 시작하더니 채 100년이 못 되어서 삼천리 금수강산이 왜놈들에게 송두리째 넘어갔다.

 

 

<참고 문헌>

이우성임형택 편역, <이조한문단편집 2> (창비, 2019)

이혜숙 글, 정경심 그림, <도깨비 손님>(창비, 2011)

<궤반탁(饋飯卓> 견곤귀매(見困鬼魅), <靑邱野談>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