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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의 아랫목 같은 옛이야기

해인사를 깔보다가 한 방 먹은 박문수

진영갈매기 2020. 12. 11. 12:53

 

마패

 

 

 

박문수(朴文秀, 1691~1756)라고 하면 우리는 암행어사를 생각합니다. 조선 시대에 수많은 암행어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박문수 외에 우리는 어떤 암행어사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 박문수가 서민의 벗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늘 백성을 자기 가족처럼 생각했으며, 백성들은 그가 있으면 행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암행어사 임명장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 1691~1756)의 문수는 문수보살(文殊菩薩)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리산은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지()자와 리()자를 가져다 산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대웅전: 석가보니를 가운데 두고 보현과 문수가 양쪽에서 협시하고 있다

 

 

물론 문수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갖가지 다른 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지혜로운 이인(異人)이 많이 계시는 산'이란 뜻으로 지리산(智異山)으로 적는다고도 합니다.

 

늦게까지 자식이 없어, 박문수의 모친이 100일 동안 인근 사찰의 스님들을 모셔와서는 매일 공양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100일째 되는 날 스님을 모시러 갔던 하인이 혼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물으니, 하인이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습니다.

절에 가보니 스님이 딱 한 사람 있었는데,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그러자 박문수의 모친이 하인을 꾸짖었습니다.

이 사람아! 스님을 모셔오라 했지, 누가 문둥병 여부를 살피라고 했느냐.”

 

하인이 다시 가서 얼굴이 문드러진 문둥병 걸린 스님을 모셔오자, 어사의 모친은 정성껏 스님께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 스님은 아무 말도 없이 공양을 다 드시고 고름을 흘리면서 대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날 저녁 부인이 꿈을 꾸었는데 희한하게도 대문 밖에서 고름이 연꽃으로 변하고 스님이 문수보살로 변하여 하늘 저쪽으로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 달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얻은 아들이라 해서 이름을 박문수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해인사

 

해인사 대적광전

 

박문수에 얽힌 일화와 민담이 무수히 널려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한가지 박문수가 기야산 해인사에서 봉변당한 일을 소개할까 합니다.

 

어느 해 박문수가 합천군수로 부임해갔을 때의 일입니다. 원래 지명은 좁은 내라는 뜻의 협천(陜川)이지만, 합천으로 읽습니다. 이 지역이 온통 험준한 산과 좁은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렇겠죠.

 

 

 

가야산 국립공원은 해발 1,430M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조선팔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가야산에는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법보종찰 해인사가 있다.

 

때는 조선 시대. 불교가 그렇게 좋은 대접을 받는 시대는 아닙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불교는 멸륜해국의 사교(邪敎)라고 배척했습니다.

 

멸륜(滅倫)이란 인륜을 망친다는 뜻이니 결혼하지 않는 것을 말함이고, 해국(害國)이란 나라를 해롭게 한다는 뜻이니 세금도 안 내고 군대도 안 간다는 뜻입니다.

 

박문수도 사대부니 그렇게 생각했겠죠. 모친의 은혜를 생각해서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지금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우리나라 제일가는 절 중의 하나인 합천 해인사에는 신라 말기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이 있습니다.

 

 

 

 

최치원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말년에 이곳에 꽂으며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가야산 홍류동 계곡으로 표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후에 이 지팡이에서 움이 돋아나 자라 지금의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나무를 볼 수 없습니다. 태풍 '링링'에 의해 2019년 9월 7일 생물학적 가치를 상실했습니다.

 

 

 

태풍에 의해 망실된 학사대 전나무

 

최치원을 흠모하던 박문수는 날을 잡아 해인사를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해인사로 올라가는 길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 풍광이 참 좋습니다만 무척 힘든 여정입니다.

 

한창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는데, 홍류동 계곡 시냇물 사이로 무언가가 더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박문수가 그게 무엇인가 하고 보니 콩나물이 몇 가닥 떠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해인사 홍류동 계곡

 

박문수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쯧쯧 하고 혀를 찼습니다.

이 뜨거운 여름에 시원한 곳에서 쓸데없는 도나 닦는다고 앉아있는 주제에 입에 들어가는 음식을 귀한 줄 모르고,……

 

그렇게 입속으로 뭐라 그러며 서너 걸음 발걸음을 뗐을 때, 스님 두 사람이 허겁지겁 뛰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박문수가 보니까,

 

글쎄! 그 두 동자승이 시냇가로 풍덩 뛰어 들어가더니 콩나물을 양손으로 떠서는 숨을 휴! 하고 내쉬더니 값비싼 산삼이나 되는 것처럼 가지고 해인사로 조심조심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안 봐도 전후 사정을 다 알 것 같아서 박문수는, ‘역시 해인사는 해인사구나! 하고탄복하면서 함부로 생각했던 저 자신을 나무랐습니다.

 

 

해인사는 절중의 절, 총림이다

 

해인사 경내에 들어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절집의 어른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주지를 찾아뵈었습니다.

 

서로 인사를 하고 차를 마시면서 덕담을 하고 주지의 인도 아래 학사대에 가서 최치원의 전나무도 구경하면서 해인사 경내를 돌아봤습니다.

 

돌다 보니 수행 중이니 들어오지 마시오.’라고 팻말이 쓰여 있는 곳이 한 군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지가 그곳은 모른 척 빼놓는 것입니다.

 

 

해인사 선방

 

 

박문수는 저곳이 그 이름도 유명한 해인사 선방이구나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짓궂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척 주지 스님께 말을 건넸습니다.

 

해인사 스님들이 도가 높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선방 구경이나 한번 해봤으면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주지 스님이 갑자기 곤란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공부 중에는 비록 주지라도 선방에 일없이 드나드는 것은 금지되어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천하의 박문수가 부탁하는데,

 

그래서 박문수를 데리고 선방으로 살그머니 들어갔습니다. 방문을 조금만 열고 한참 수행 중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아뿔싸! 마침 그때가 음력 7월이니 한여름이라, 큰 방안에 100여 명의 스님이 좌복[방석] 위에 열을 지어 앉았는데, 모두 약 먹은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고 앉았습니다.

 

모르는 척하면 될 것을, 그 모습을 본 박문수가 주지 스님에게 능청스럽게 물었습니다. “스님, 지금 저 스님들이 뭐 하고 있습니까?”

 

누가 봐도 선방 수좌들은 앉아서 졸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무위도식한다고 사대부들의 뒷말이 많은데 제대로 걸린 것입니다. 그것도 영조 대왕과 바로 통하는 박문수에게,

 

 

영조대왕

 

주지가 할 말이 없어서 눈만 끔뻑끔뻑하고 있는데, 옆에서 주지 스님 시봉 들고 있던 나이 어린 행자가, 눈치를 채고, 대신 끼어들었습니다.

 

원님! 저건 말입니더. 안 있습니꺼. 우리 스님들이 사방[] 공부와 팔방[북동남동북서남서] 공부를 다 끝내고 이제 시방[十方, 무한한 우주 전체]으로 가는 마지막 남은 상하 양방공부를 하느라고 위로 쪼고 아래로 쪼고 하는 깁니더.”

 

행자의 말은 들은 박문수의 입에서 탄식이 나왔다고 합니다.

천하제일 도량 해인사라는 말이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구나.”

 

 

 

박문수

 

이때부터 박문수는 어디에 가서라도 불교 이야기가 나오면 해인사의 콩나물 몇 가닥을 따라 십 리 넘어 개울을 쫓아온 어린 스님과 선방에서 자기에게 멋있게 한 방 먹인 행자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