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열서너 살 무렵의 소년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는, 길을 가던 사람들이 한번은 반드시 되돌아볼 정도로 태도가 의젓하고 용모가 준수했다.
정암 조광조는 거의 매일 서책을 끼고 공부를 다녔는데 그 왕래하는 모습을 이웃에 사는 아전(衙前)의 외동딸이 보고 깊이 사모했다.
그러나 자기의 사랑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절로 가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세월이 가면서 그리운 마음에 병이 들었고 상사병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울 정도로 깊어졌다.
처녀의 부모에게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이름난 의원을 불러 진맥을 해보아도 누구도 병이 난 원인을 알지 못하므로,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부모 또한 않아 누울 지경이 되었다.
병이 위중해지고 도저히 살아날 길이 없게 되자, 처녀가 양친 부모를 불러서는 비로소 자기의 심정을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처녀의 아비 되는 이가 조정암에게 직접 말을 해볼까 하다가도 그 엄숙한 용모를 바라보고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대신 정암의 부친에게 울면서 사정을 호소했다. 부친이 가엾게 여겨 정암을 불러서 넌지시 말했다.
“너로 말미암아 죽는 사람이 있다면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
“저와 관계없는 사람이라도 살릴 만하면 살려야지요. 하물며 저 때문에 죽는 사람이 있다면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에 정암의 부친은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처녀의 아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이 비록 관청의 아전으로 신분이 미천하나 그 딸은 처자(處子)이다. 네가 첩으로 받아들이면 예의에 어긋날 것이 있겠느냐? 그 소원을 들어주도록 하여라.”
조광조가 말했다.
“규중의 처자가 부모의 명(命)과 중매의 말에 의하지 않고 사사로이 남자를 엿보아 음란한 마음이 발동했으니 그 허물이야말로 죽어도 족히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아버님은 자식을 예의범절로 가르치심이 마땅하거늘, 어찌 소자에게 음탕한 여자를 첩으로 두라 하십니까?”
정암의 부친은 한숨을 길게 쉬며 더 말을 잇지 못했고, 눈물을 흘리며 그 광경을 지켜본 처녀의 아비는 집으로 돌아가서도 차마 자기의 딸을 바로 보지 못하였다.
처녀의 병세가 더욱 위급해가므로 그 아비와 어미가 다시 조정암의 집에 와서는 마당에 꿇어앉아 울부짖었다.
“사세가 급하옵니다. 만에 하나 요행을 바랍니다.”
부친이 이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재차 정암에게 명했으나 정암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처녀의 아비와 어미는 통곡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처녀는 제 부모를 보자 마지막 기력을 짜내어 말하였다.
“저는 벌써 요행이 없을 줄 알았어요.”
말을 끝내자 처녀는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린 채 숨을 거두었다.
장례를 치르는데 상여가 정암의 집 대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동네 사람 모두가 울며 정암에게 호소하였다.
“상여가 움직이지 않으니 도련님이 글자 몇 자를 써주십시오.”
정암이 자기의 속옷에 글자 몇 자를 써서 널에 올려놓았더니 상여가 그제야 움직였다.
조선 제일의 개혁사상가로 불리던 조광조가 나중에 능주(綾州 :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로 귀양을 가고 결국 중종(中宗)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는 앙화(殃禍)를 입는 것은 이 처녀의 원한 때문이라고 세상에서 말한다.
그 가여운 처녀의 잘못은 외간 남자를 사사로이 엿본 데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정암에 두 가지 잘못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 부친의 명이 불의가 아닌데도 따르지 않았다.
둘째, 어린 여자를 가엾이 여겨 동정을 베풀지 않고 지나치게 질책했다.
선비는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정암의 기질이 꼭 그랬다.
나라의 동량(棟梁)이 되고도 남을 인재였지만 너무나 곧은 사람이었기에 38세의 나이에 일찍 부러졌다.
그 기질을 조금만 삭혔으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참고 문헌>
이우성·임형택 편역 <이조한문단편집>1권(창비, 2018년)
안석경(安錫儆) <삽교별집(霅橋別集)>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김홍도 그림,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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