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떤 마을에 일찍 남편을 잃고 외아들과 함께 사는 청송댁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청송댁이 산속의 암자에서 수행하는 스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갔습니다.
그 스님은 도력이 높을 뿐 아니라 기적의 치료약을 만든다고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청송댁이 암자 안으로 들어가자 경전을 보고 있던 스님은 온화한 어조로 물었습니다.
“보살님! 그래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아! 덕이 높으신 스님, 저는 지금 곤경에 처해있습니다. 제발 저를 위해서 치료약을 만들어주세요.”
“치료약을 만들어달라고요?”
스님은 눈가를 가늘게 찌푸리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툴툴거렸습니다.
청송댁은 거듭 고개를 조아리며 하소연했습니다.
“스님! 스님께서 저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는 끝장이랍니다.”
스님은 청송댁의 사정이나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래 무슨 병이 들었길래 이렇게 다급하오?”
“금쪽같은 제 외아들이 병이 들었습니다.
아들은 지난 삼 년 동안 전장에 나가서 싸우고 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는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려 들지 않습니다.
제가 말을 해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말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식사 때도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으면 상을 밀치고는 그냥 나가버립니다. 논에 일하러 나가서도 일은 안 하고 언덕에 앉아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답니다.”
“흠, 그건 보살님의 아들뿐 아니라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이면 다들 그런다오. 못 볼 것을 너무 많이 본 탓이겠지. 나무 관세음보살! 그리고 또 계속해보시오.”
“스님, 제발 아들을 예전처럼 상냥하고 착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만들 약을 지어주세요. 이 세상에서 제 소원은 그것뿐이랍니다. 아! 예전의 아들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제 목숨이라도 내어놓겠습니다.”
“하하, 이렇게 간단한 일을 가지고 목숨까지야! 좋소, 내가 고민해볼 터이니, 사흘 후에 다시 찾아오시오.”
약속한 날이 되자 청송댁은 스님의 암자로 다시 갔습니다.
청송댁은 본 스님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치료약을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예, 무슨 문제가?”
“약재가 많이 필요한데, 제일 중요한 재료가 없습니다.”
“어떤 재료가?”
“살아있는 호랑이 수염이 필요합니다.”
“예! 스님, 제가 그걸 무슨 재주로?”
“보살님이 목숨이라도 내어놓겠다고 하지 않았소? 꼭 필요하니 보살님이 구해오시오.”
스님은 이 말을 하고 난 뒤에 돌아앉아서 경전만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청송댁은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호랑이 수염을 구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습니다.
밤이 깊어 세상이 고요할 때 청송댁은 고깃국이 담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알려진 산으로 갔습니다.
첫날은, 호랑이가 있는 동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함지박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고깃국을 먹으라고 호랑이를 불렀습니다.
호랑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밤 또 호랑이에게 갔고 이번에는 좀 더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고깃국을 권했습니다.
그렇게 매일 산으로 올라갔고 매번 전날보다 조금 더 가까이 호랑이 동굴로 다가 갔습니다.
호랑이는 점차 그녀가 오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밤 청송댁은 호랑이 동굴에서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로 거리를 좁혔습니다.
이번에는 호랑이가 청송댁에게 몇 발자국 다가오더니 멈췄습니다.
청송댁과 호랑이는 달빛 아래서 서로 쳐다보며 마주 서 있었습니다.
다음 날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주 가까웠으므로 청송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호랑이에게 말을 걸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밤, 호랑이는 청송댁의 눈을 조심스럽게 쳐다보더니 마침내 함지박의 고깃국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청송댁은 호랑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호랑이가 고깃국을 다 먹고 나면 청송댁은 손으로 호랑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반년이 흘렀습니다.
청송댁은 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말했습니다.
“호랑이야! 착하지. 네 수염을 하나만 뽑아가야겠어. 그러니 너무 화내지 말아줘.”
그리고 청송댁은 호랑이의 수염을 하나 홱 뽑아냈습니다.
호랑이는 청송댁의 걱정과는 달리 화를 전혀 내지 않았습니다.
청송댁은 손에 호랑이 수염을 꾹 움켜쥔 채 반은 뛰고 반은 구르면서 산길을 내려갔습니다.
다음 날 해가 뜨기도 전에 청송댁은 스님의 암자로 갔습니다.
“스님! 호랑이 수염을 드디어 구해왔습니다.”
스님은 호랑이 수염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부엌으로 가서는 아궁이 불 속으로 휙! 하고 던져 넣었습니다.
“아니, 스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저는 목숨을 걸고 구해왔는데.”
그러자 스님이 물었습니다.
“호랑이 수염을 어떻게 구해왔소?”
청송댁은 손짓, 발짓해가며 지난 반년 동안 그녀가 고생했던 일을 죄다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말했습니다.
“맞아, 바로 그거요. 보살님은 호랑이를 길들였고 마침내 호랑이의 믿음과 사랑을 얻었지요.”
그 말을 들은 청송댁이 입술을 쫑긋거리며 쏘아붙였습니다.
“하지만 스님이 불 속에 던져버렸잖아요. 이제 그동안의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어요.”
스님이 즐거운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절대 그렇지 않소. 내가 보살님께 하나만 물어봅시다. 사람이 무섭소? 호랑이가 무섭소?”
“그거야, 호랑이가 더 무섭죠.”
“보살님이 반년 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친절과 사랑을 베푸니 금수인 호랑이도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래서요?”
“사납고 피에 굶주린 호랑이에게도 사랑과 믿음을 얻어 내는데, 아들에게서도 얻어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소? 집에 가시오. 가거들랑 호랑이에게 하듯 아들에게 해보시오.”
스님의 말을 듣고 나자 청송댁은 잠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다가 홀연 침침해졌던 눈이 환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스님이 깨우쳐준 가르침을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청송댁은 천천히 산길을 내려왔습니다.
* 참고 자료
조안나 코울 편, 서미석 옮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200가지 이야기 3》(현대지성사, 1999)
김혜경 그림, <담배 피는 호랑이>
신윤복의 그림, <미인도> 등, 여러 점
김홍도의 그림, <논갈이> 등, 여러 점
고려 몽골의 전쟁(문화콘텐츠닷컴)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전쟁기념관 소장)
서울 관악산 연주대, 연주암
전남 해남 달마산 도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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