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집으로 가는 길 도중에 천 년 묵은 아름드리 고목이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 나무 아래를 지나는데 어디선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라 만석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들아, 내 아들아! 나는 네 아버지의 혼령이다. 내 말을 잘 들어라. 너는 ‘그것’을 만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천년이나 된 요망한 지네가 여자의 몸으로 변신했을 뿐이다. 제발 부탁이니,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어서 돌아가거라.”
그 목소리는 확실히 죽은 부친의 목소리였습니다.
하지만 만석은 두고 온 처녀가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나는 그 여인을 만나야 합니다. 저는 그 여인에게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누구도 내가 약속 지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 데다가 저는 죽었던 목숨이라 죽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여인은 저의 목숨을 이미 한번 살려준 여인입니다. 인제 와서 새삼스레 저를 해칠 리가 없습니다.”
“아니다. 아들아, 내 아들아! 제발 내 말 좀 들어다오. 너는 지금 스스로 죽음의 구렁텅이로 들어가고 있다. 내가 오죽하면 염라대왕에게 간청하여 저승에서 이승으로 넘어왔겠느냐!”
“아버지, 그 여인은 우리 식구를 굶어 죽을 처지에서 먹여 살린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러자 낙심한 듯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습니다.
“너의 결심이 그렇게 굳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좋다. 가거라.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귀여운 손자를 아비 없는 자식으로 만들 수는 없구나.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나 하겠다. 들어줄 수 있겠느냐?”
“말씀해보시지요.”
“아들아, 내 금쪽같은 아들아! 네가 살 수 있는 길이 딱! 한 가지 있다. 명심해서 들어라. 가는 길에 장(場)에 들러서는 가장 독한 담배를 한 봉지 사도록 하여라. 가는 길에 계속 그 담배를 피워서 입안에 냄새가 심하게 배도록 하여야 한다. ‘그것’의 집에 도달할 즈음에는 다시 담배를 피우되 연기를 내뿜지 마라. 계속해서 입속에 머금고 있다가 ‘그것’을 보자마자 얼굴에 내뱉어라.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거나 일을 하다가 실패할 때에는 너는 죽어서 지네의 밥이 될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것도 아들이 해야 할 일이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만석은 장에 가서 가장 독한 담배 한 봉지를 사서 주머니에 넣은 다음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여인의 집으로 가는 중에도 줄곧 담배를 피우면서 갔습니다.
여인의 집에 이르자 예전에 그녀가 시킨 대로 크게 소리쳐 부르며 문을 두드리려고 하다가, 문득 행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살며시 대문을 뛰어넘었습니다.
대청 가까이에 이르러서 살며시 안을 엿보았습니다.
방안에서는 노랑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은 그녀가 얌전하게 앉아서는 바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아버지도 주책이시지, 괜한 소리를 해서는 사람을 실없게 만드네.’
기쁜 마음에 인기척을 하려는 순간, 바느질하다가 목이 말랐던지 처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구석에 놓여 있던 자리끼를 들어서 마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워라!’
치마 밑으로 커다랗고 기다란 지네의 꼬리가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말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만석은 그 길로 담을 뛰어넘어 도망을 쳤습니다.
뛰다가 생각하니 여인이 자기를 죽일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죽일 것 같으면 벌써 죽였지 지금까지 살려 줄 이유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죽을 땐 죽더라도 여인의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습니다.
여인의 그리운 가슴 사이에 얼굴을 푹 파묻고 싶기도 했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만석은 길을 돌려 여인의 집으로 갔습니다.
가서는 대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며 예전에 한 약속대로 여인을 큰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그런 다음 만약에 벌어질지도 모를 일을 대비하여 얼른 담뱃대를 꺼내 담배를 피운 다음 입안에 담배 연기를 잔뜩 머금었습니다.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문을 열고 나와서는 웃으며 만석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만석은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기에 두 팔을 들어 여인을 껴안고 애정이 가득 담긴 말을 퍼붓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입안에 담배 연기를 잔뜩 머금고 있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인이 손을 잡으려다가 만석의 꼭 다문 입과 수상한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있어 났음을 느꼈는지 순간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만석은 방에 들어가서 뚫어질 것처럼 그녀를 쳐다보았습니다.
여인은 그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검고 윤기 나는 머리, 수정같이 빛나는 맑은 눈, 동그란 이마 그리고 달걀만 한 크기의 뽀얗고 하얀 얼굴, 봉곳이 솟은 가슴, 낭창낭창한 허리,……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만석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과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준 엄한 경고 사이에서 갈등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상대는 지네였습니다.
마음을 굳힌 만석이 입안의 담배 연기를 그녀의 얼굴에 막 뱉으려는데, 여인이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울기 시작하는 여인을 바라보니 전보다 두 배는 더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만석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주저하였습니다.
결국, 마음을 누그러뜨려 방문을 열고는 바깥을 향하여 담배 연기를 내뿜어 냈습니다.
만석이 담배 연기를 바깥으로 내뿜는 모습을 보고 난 뒤 여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인은 마침내 결심이 선 듯 말문을 열었습니다.
“소녀의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비님이 들었던 목소리는 돌아가신 부친이 아닙니다. 천 년 묵은 고목에 사는 저주받은 뱀입니다. 소녀는 사실 상제(上帝)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고 뱀은 궁전의 하급 무사였습니다. 우리는 신분을 뛰어넘어 숨어서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들키면 큰일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와 예전에 알고 지냈던 다른 무사의 밀고로, 이 일이 상제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랬군요.”
“상제는 우리 둘과 그 무사에게 벌을 내렸습니다. 저는 1,000년 동안 인간 세상에서 지네로 살아야 했지만, 저와 교제했던 그 무사에게는 영원히 뱀으로 살 수밖에 없는 무거운 벌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를 밀고했던 그 무사에게도 인간 세상에서 영원히 수탉으로 살아가게 하였습니다.”
하도 기가 막히는 이야기라 만석은 귀를 쫑긋 세우고 처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두 무사는 항상 자신들의 운명을 원망하여 저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하늘에 올라갈 때만 기다리며 1,000년 동안 수탉과 뱀을 피하여 숨어서 살았습니다. 그동안 아무 탈 없이 잘 견디어 왔는데,……”
“견디어 왔는데?”
“한강에서 선비님을 만나게 되고, 선비님을 보는 순간 저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선비님을 독차지하는 것이 너무 미안해서 도술을 써서 선비님의 가솔(家率)에 땅과 집을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것이?”
“뱀에게 들킨 것이죠. 그래서 선비님의 돌아가신 아버지인 것처럼 꾸며서는 선비님을 이용해서 소녀에게 천년의 원한을 갚으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이 저의 죗값을 치르는 마지막 날이고 내일 정오가 되면 소녀는 천상으로 올라갑니다. 만약 선비님이 제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었다면 저는 지네로 1,000년을 이 세상에서 더 살아야 하는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저를 위험에서 구해 주셨으니 선비님께 조그만 선물을 남기고자 합니다. 내일 소녀가 하늘로 올라가고 난 뒤 이 집을 선비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장독대에 가서 장독을 열어보시면 장독마다 온갖 보물이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가지고 가셔서 처자식들과 편안한 여생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뭐! 그렇게까지,…… 어쨌든 고맙소이다.”
만석과 지네 처녀는 마지막으로 행복한 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내일이면 헤어질 운명이라, 두 사람은 밤새 서로를 탐하였고, 그러다가 지쳐 잠이 들었습니다.
만석이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데, 선득 찬 기운이 몰아치는 것 같더니, 어디선가에서 시끄럽게 닭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라서 후닥닥 일어서니, 저쪽에서 수탉 한 마리가 입에 지네를 물고는 흔들어 대더니 꿀꺼덕 삼키고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하고 생각하는 순간에 대궐 같던 집이 사라졌습니다.
만석이 누워있던 비단 금침도 커다란 바위로 변했습니다.
입고 있던 옷도 예전에 집을 떠날 때 걸치고 있던 누더기 그대로였습니다.
장독대도 다 사라졌습니다.
허겁지겁 한양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가서 보니 본래 집도 쑥대밭이 되어 버리고 가족들도 온데간데없었습니다.
만석은 다리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세상 모든 일이 한바탕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거품과 같고,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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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해설>
자리끼 : 밤에 자다가 마시기 위하여 잠자리의 머리맡에 준비하여 두는 물
상제(上帝) : ≪삼국유사≫에 나타나 있는 단군에 관한 기록을 보면, 상제는 천상에서 조정 대신들을 거느리면서 지상의 만물을 감독하는 자로 설명된다.
가솔(家率) : 처자식. 집에 거느리고 있는 식구
<참고 자료>
《금강경》
정인섭 지음. 최인학, 강재철 역편, 《한국의 설화》(단국대학교 출판부, 2007)
김홍도의 그림, ‘논갈이’ 등
신윤복의 그림, ‘연소답청’ 등
우정사업본부 2019년 발행 우표 ‘한복의 멋’
‘동영전설’ / 출처, 중국 포털 바이두
담뱃대, 국립민속박물관
윤국헌 사진창고, 푸른하늘. m.blog.daum.net/photovan/1300
한국의 조류 http://aveskorea.com/
철계투오공(닭과 지네의 싸움)/카카오TV
☞ 링크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6Oer7r5t6Kb1gmuR9jaQzA
방랑자 블로그 https://bonghw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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