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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동시에 세 남자와 결혼하다

진영갈매기 2020. 12. 5. 12:51

 

신라 천년의 미소

 

 

오늘은 친언니의 남편뿐 아니라 애인까지 빼앗은 선덕여왕의 기막힌 사연을 알아보겠습니다.

 

신라 26대 진평왕(579632)은 아들이 없고 두 딸만 있었습니다. 맏딸인 천명은 오촌 당숙인 용춘을 마음속으로 흠모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차자 어머니 마야왕후에게 속셈을 털어놓았습니다.

 

어머니,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용숙(龍叔)만 한 남자가 없습니다.”

황후는 천명이 말하는 용숙이 동생인 용춘이 아니라 형인 용수라고 생각하고 사위로 점찍었습니다.

 

용수와 용춘은 진평왕과 사촌 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천명에는 오촌 당숙이 됩니다.

왕후의 귀띔을 들은 왕은 공주를 용수와 혼인시켜 사위로 삼았습니다. 잘못알고 시집을 보낸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대들지는 못했지만, 공주는 내심 불만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용춘에게 가서 자기의 마음을 은밀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제가 본래 그리워한 사람은 용춘 숙부 그대입니다.”

 

용춘은 무척 놀랐지만 점잖은 사람이라 조용하게 대답했습니다. 집안의 법도는 맏아들이 귀한 것인데 신을 어찌 감히 형님과 견주겠습니까?” 하지만 천명은 용춘을 단념할 수가 없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명의 용춘에 대한 사랑은 깊어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남편 용수가 공주의 마음을 눈치채고 여러 가지 꾀를 써서 용춘과 동침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용춘은 힘써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나중에는 마야 황후까지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고는 용춘을 불러 공주와 함께 묵도록 했습니다. 용수 또한 병을 칭하고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하지만 용춘은 술은 같이 먹었지만 잠자리는 피했습니다.

 

천명의 동생 선덕공주가 점점 자랐는데, 자태와 위용이 왕위를 이을만했습니다. 그래서 진평왕은 용춘에 관심을 두고 천명에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했습니다. 천명은 효심으로 순종하고 출궁(出宮)했습니다. 이후 천명의 신분은 진골로 떨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성골(聖骨)만이 왕위계승권을 가졌는데,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천명과 선덕이 성골로서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명에 그 지위를 포기하라고 진평왕이 종용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천명 대신 선덕이 왕위 계승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여왕이 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손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선덕은 왕에게 말했습니다. “용춘이 능히 저를 보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용춘은 선덕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뿔싸! 일 년이 지나도 선덕이 잉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시가 급한 왕이 천명의 남편인 용수에게 선덕을 모시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인 용춘을 양보했건만 이제는 남편까지 동생에게 빌려줄 형편이 된 천명은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왕의 명령인데,…… 하지만 용수 역시 일 년이 다 지나도록 소득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용수와 진평왕이 죽고 632년 선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용수가 죽은 후 용춘은 형의 아들 춘추와 처인 천명을 자신의 아내와 아들로 삼았습니다.

 

선덕여왕

 

후사를 이을 왕자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자, 이에 선덕은 용춘을 다시 지아비로 맞기로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천명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만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성골 남자가 씨가 말랐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얻기 위하여 궁여지책으로 용춘과 다시 결합했으나 여전히 태기는 없었습니다. 이에 조정의 중신들이 모여 선덕여왕의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그런 다음 여왕에게 아뢨습니다.

 

용춘을 지아비로 삼았으나 잉태가 되지 않으니 삼서지제(三婿之制)에 따라 세 명의 남편을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삼서지제는 여왕이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세 명의 남편을 두는 제도입니다. 신라에서 널리 통용되지는 않았고 사례는 선덕여왕 한 번만 보입니다.

 

숙부를 남편으로 둔다는 것이 요즈음의 시각으론 천륜을 저버린 행위로 보이지만, 신라 시대 사람들은 근친혼이 곧 혈통을 보존하기 위한 최선책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도 나중에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딸, 즉 자신의 조카와 결혼합니다.

 

 

 김유신 장군과 태종무열왕 김춘추

 

 

선덕여왕은 중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숙부인 김용춘 말고도 김흠반과 김을제를 남편으로 맞아들입니다. 이렇게 했어도 여왕은 태기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용춘이 물러나려는 뜻을 보이자, 여왕이 허락합니다.

 

용춘은 물러나서 다시 천명을 처로 삼고 형의 소생인 춘추를[훗날의 태종무열왕] 아들로 삼습니다. 용춘은 천명과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다가 647년 일흔의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선덕여왕 능

 

선덕여왕이 죽자 647년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진덕여왕이 7년 만에 죽자 김춘추가 654년 왕위에 오릅니다. 우리가 아는 태종무열왕이 바로 천명공주의 아들입니다. 바야흐로 통일의 시대가 다가오는 것이죠.

 

[선덕여왕의 업적을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황룡사 구층 목탑이 있군요

자장(慈藏)의 권유에 따라 선덕여왕은 호국 의지를 담아 황룡사 9층 탑을 축조했습니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이 목탑은 이웃의 아홉 적을 상징하는 9층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황룡사 구층 목탑

 

 

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제주도), 5층은 응유(鷹遊, 백제),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穢貊 고구려)을 억누르는 것을 상징합니다.

 

국보 31호 첨성대도 있습니다. 선덕여왕 재세 시에 건설한 천문관측시설입니다.

 

 

첨성대

 

그러나 다른 시각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용도도 쓰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덕여왕이 자손을 얻기 위해 지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명과 장수 등을 관장하는 신인 북두칠성을 믿는 신앙이 칠성 신앙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추리입니다.

 

분황사가 있습니다

분황사(芬皇寺)는 황룡사지와 잇닿아 있으면서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모전 석탑으로도 유명합니다. 선덕여왕 3(634)에 지어진 절로서, 원효대사가 거주하면서 화엄경소를 쓴 장소이기도 합니다.

 

 

분황사

 

 

분황사의 모전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입니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습니다.

 

 

분황사 모전석탑

 

 

통도사 창건하셨군요. 선덕여왕은 15(646)에 자장율사를 앞세워 통도사를 세웁니다. 스님께서 당에서 부처님의 두골(佛頭骨), 치아(佛齒)등 사리(佛舍利) 100 립과 부처님이 입으시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한 벌을 가져왔습니다.

 

 

양산 통도사 전경

 

 

사리를 3분하여 일부분은 황룡사탑(皇龍寺塔)에 두고 일부분은 태화사탑(太和寺塔), 일부분은 가사(袈裟)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습니다.

 

 

통도사 금강계단

 

 

이 계단이 금강계단입니다. 본래 금강계단이 축조되기 이전 통도사는 큰 못이었습니다. 스님이 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통도사를 창건하셨습니다.

그래서 통도사에는 불상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으니까요.

 


     * 참고 문헌 *

김부식 지음, 이재호 옮김, <삼국사기>(솔출판사, 2006)

일연 지음, 이재호 옮김, <삼국유사>(솔출판사, 2008)

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화랑세기>(소나무, 2009)

김대문·각훈 지음, 여성구 옮김, <화랑세기/해동고승전>(지만지, 2008)

박은몽 지음, <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 스캔들>(랜덤하우스, 2009)

* 일부 자료와 사진 출처

경주국립박물관

정동극장 경주브랜드 공연 <미소2-신국의 땅, 신라>

구체적인 페이지 등은 명기하지 않았습니다. 양지하시기 바랍니다